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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2 '윤석열 부부 허수아비' 등장한… 노총 ·전농 집회

담바우9823 2024. 11. 20. 20:33

241122 (금) '윤석열 부부 허수아비' 등장한… 노총 ·전농 집회

민주노총 조합원과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소속 농민 수천 명이 1120일 오후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서울 중구 숭례문 앞에 모였다. 하원오 전농 의장은 이날 오후 3시부터 시작된 전국농민대회·윤석열 정권 퇴진 2차 총궐기 집회에서 9년 전 농산물값 보장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 물대포에 쓰러져 사망한 고 백남기 농민을 언급했다.

 

하원오 의장은 "박근혜를 끌어내린 지 8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나"라며 "생산 기반을 뒤흔드는 재배면적 감축을 제지하고 식량 주권을 실현하자. 수입 제지하고 농산물 가격 보장 받아내자"라고 외쳤다. 임만수 전국쌀생산자협회 전북본부장은 "지금 우리 쌀 생산량은 2018년 통계청 발표 435만 톤에서 현재 350만 톤으로 줄었다""국민 먹는 소비량은 (같은 기간) 30만 톤밖에 안 줄었다. 그런데 쌀이 남아도는 이유는 수입쌀이 섞여서 우리 쌀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윤석열 정권은 노동자와 농민의 삶에 관심이 없다""노동자들은 전태일 열사의 정신으로, 농민들은 전봉준 장군 정신으로 백남기 농민의 뜻을 잇기 위해 정권 퇴진 투쟁에 나서자"고 말했다. 이날 집회는 지난 119일 민주노총이 주최한 '1차 총궐기' 집회와 다르게 별다른 충돌 없이 전반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됐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얼굴 사진을 붙인 허수아비와 '윤석열 퇴진!' 문구가 적힌 상여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집회 대열 중간에는 깃발을 흔들며 "윤석열은 퇴진하라"고 연신 외치는 시민이 보였고 정권 퇴진 국민투표 서명을 받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부부젤라를 불거나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그대로 앉아 음식을 먹었다. 일부 참가자들은 모여 앉아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는데, 술에 취한 몇 명이 경찰관에 시비를 걸자 주변 동료들이 만류해 곧바로 진정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집회 현장 인근을 지나가는 시민들은 인도 곳곳에서 흡연하는 일부 참가자들의 담배 연기에 인상을 찡그렸다. 20~30대로 보이는 여성 2명은 버스정류장을 가리키며 "여긴 버스가 막혔잖아"라고 짜증을 내고 걸어갔다. 한 중년 여성은 무대 근처를 지나다 소리가 시끄러운지 무선 이어폰을 꺼내 착용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이날 총 1만 명 정도 모인 것으로 추산했다. 반면 경찰은 약 6000~7000명 수준으로 보고 있다.

 

집회 참가자들은 오후 422분부터 용산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경찰은 집회·행진 관리를 위해 숭례문 앞 서울역 방향 세종대로 3개 차선을 통제하고 옆 차선을 가변차로로 운영하고 있다. 이날 집회로 인해 도심 곳곳에서 교통이 통제되면서 차량 정체가 빚어지고 있다. 오후 440분 기준 현재 도심 통행 속도는 시속 11.6로 정체된 상태고 서울시 전체 통행 속도는 시속 18.5로 서행 중이다.

 

 

 

 

 

 

 

 

 

 

 

 

배식봉사 나선 한덕수 총리"더 잘하겠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1119일 서울 영등포 쪽방촌 앞 급식소를 찾아가 배식봉사를 했다.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을 비롯한 간부 29명도 동참했다. 방기선 실장이 간부들도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게 좋겠다고 제안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덕수 총리가 이날 찾은 곳은 사회복지시설 '토마스의집'이다. 1993년에 문을 연 급식소로 일용직 근로자, 쪽방촌 주민, 노숙자 등이 한 끼에 200원을 내며 이용하고 있다.

 

시설 이용자들이 공짜 밥은 먹기 싫으니 밥값을 받으라고 건의하자 '자존심 유지비' 명목으로 받고 있다. 시설 이용자들이 낸 돈은 취약계층 지원에 다시 쓰인다. 한덕수 총리와 간부들은 하늘색 조끼에 앞치마, 투명 플라스틱 마스크를 착용하고서 밥과 소고기미역국, 돼지고기볶음 등 반찬을 배식하고 서빙에도 참여했다. 배식판과 반찬통이 엎어지며 장내가 잠시 소란해지기도 했으나 급식소 이용자들은 한덕수 총리와 사진을 찍거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식사했다.

 

국무총리가 밥을 퍼주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용자들은 "총리가 떠주는 밥은 언제 또 먹겠냐"고 말하는 등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배식이 어느정도 마무리되자 급식소 관계자가 한덕수 총리에게 "홀 서빙도 부탁드려요"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한덕수 총리는 배식봉사가 끝난 후 토마스의집 관계자들을 격려하는 자리도 가졌다. 한덕수 총리는 토마스의집을 찾은 이유에 대해서 먼저 언급했다.

 

한덕수 총리는 노숙자 출신 임상철 작가의 자서전을 언급하면서 "노숙하는 처지에도 자기 돈 내고 끼니를 해결하려고 추운 날 토마스의집까지 일부러 걸어가곤 했다는 사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추위 속에 줄을 서 계신 분들을 직접 보고 마음이 뭉클했다""정부 도움 없이 어려운 일을 해오신 토마스의집 관계자들께 감사드린다"고 격려했다.

 

그러면서 "각종 복지제도가 빈틈없이 원활하게 작동돼 취약 계층의 분들이 겨울을 잘 견딜 수 있도록 정부가 더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덕수 총리는 아울러 "저들이 힘을 얻어서 앞으로 자립하도록 정부도 더 힘을 쓰겠다""훌륭한 일을 하는 기관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고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한덕수 총리는 이날 오후 1시께 배식봉사와 면담을 마무리하고 급식소에서 퇴장했다. 이때 한 이용자가 한덕수 총리에게 "정치를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자, 한덕수 총리는 "제가 더 잘하겠다"고 답했다. 또 다른 이용자는 "총리님, 파란색 입고 오셨네"라고 말을 건네자, 한덕수 총리는 "넥타이는 빨간색"이라고 말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한편 이날 국무조정실은 직원 성금 등을 모아 토마스의집에 김, 미역, 건새우, 인삼 튀김, 대봉감 등 식자재와 간식을 전달했다.

 

 

 

 

 

 

 

 

경기, 인천 상공에 뜬 신비로운 채운(彩雲)

11 19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와 인천 상공에 무지갯빛 채운(彩雲)이 각각 나타나고 있다. 채운은 냉각된 물방울이 태양광의 굴절을 일으켜 구름의 가장자리가 무지개색을 띄는 현상으로, 옛 사람들은 채운을 상서로운 구름으로 여겼다.

 

 

 

 

 

 

 

 

물에서 건진 느린 풍경광주·전주 두 성씨의 안동 명문가 된 내력

제대로 알고 행세 좀 하는 (안동) 사람들은 사실 남들이 양반으로 불러주는 걸 그리 탐탁게 여기질 않아요.” 고유명사가 되다시피 한 양반고을안동에서 들은 뜻밖의 답변이다. 김방식 군자마을 관장은 속된 말로 태어나 보니 양반’, 거저 주어진 신분이 뭐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그보다는 선비 집안이라거나 군자답다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안동댐과 광산김씨 군자마을

군자마을은 안동 시내에서 동북쪽 와룡면 오천리에 위치한 광산김씨 고택 단지다. 1974년 안동댐 공사로 수몰된 600년 세거지에 흩어졌던 묘우, 종택, 누정 등을 약 2떨어진 산자락으로 옮겨 조성한 마을이다. 가문의 역사가 남아 있는 건물을 옮겨야겠다고 결심한 건 김방식 관장 부친이었다. 형이던 종손이 후사 없이 일찍 세상을 뜨자 그 역할을 대신 맡았다. “문중을 지키자면 일종의 상징물, 집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사람이 모이고 회의도 하죠.” 그렇다고 건물을 모두 옮길 수는 없고 중요한 건물만 추렸는데도 20여 채에 이르렀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이삿짐 꾸릴 정도의 보상금으로는 어림도 없어 문중에서 모금도 하고 땅도 팔았다. “집 한 채 옮길 때마다 산 하나씩 팔았다고 생각하면 돼요.” 당시 장비라고는 불도저가 전부여서 해체한 건물 기둥을 이고 지고 끌어오는 건 문중 사람들 몫이었다. 옮겨 지은 여러 건물 중에서 탁청정과 후조당은 국가문화재로, 탁청정 종택과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침락정은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뿐만 아니다. 유물전시관인 숭원각에는 희귀 고서와 문집, 교지, 토지문서, 서간문 등 4,000여 점이 보관돼 있다. 고문서 7종과 서적 13종은 보물로 지정됐다. 한 가문이 20대에 걸쳐 한곳에 살아오면서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사료를 온전히 보존한 건 유례를 찾기 힘들다.

 

광산김씨는 지금의 광주를 기반으로 한 성씨다. 고려 후반 중앙으로 진출했는데 한 분파가 안동으로 들어왔다. 오천(외내) 입향조는 김효로(1454~1534). 아들 김연과 김유는 조선 중종 때 문신으로 향리에서 명망이 높았다. 군자마을에서도 중요 건물로 치는 탁청정은 김유의 호, 후조당은 김연의 아들 김부필의 호다. 이때부터 후손들은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등 당대의 명현 가문과 통혼하며 전형적인 영남 사족으로 터를 닦았다.

 

군자마을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문신 한강 정구(1543~1620)가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시절 이곳을 방문해 남긴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라는 기록에서 유래한다. 일곱 군자는 김부필, 김부의, 김부인, 김부신, 김부륜, 금응협, 금응훈이다. 모두 퇴계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형제거나 사촌간이고, 두 금씨는 이들과 내외종간(고종사촌과 외사촌)이다. 당대의 대학자가 이렇게 불러 주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광산김씨가 안동에서도 명문가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건 높은 벼슬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을로 통하는 길 양쪽 대문 기둥의 글귀가 예사롭지 않다. 선경유방 유장백세(善慶遺坊 流長百世). 선을 행하고 덕행을 쌓음으로 집안에 경사가 있고, 그 가풍을 영원히 이어가라는 의미다. 제 아무리 양반이라도 나누고 베풀지 않으면 민심이 멀어지기 마련이고, 그 지위를 계속 누리기 힘들다는 지혜가 담겼다.

 

마을로 들어서면 고풍스런 전각에 앞서 유물전시관 옆의 의병장군 근시재선생 순국기념비가 방문객을 맞는다. 근시재 김해(1555~1641)는 약관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에 올랐으나 곧 사임하고 낙향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예안의병장으로 추대돼 안동, 예천, 군위 등지에서 왜적을 소탕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경주에서 치열한 전투 중 사망했다. 당시 나이 겨우 39세였다.

 

마을 한가운데 마당에는 항일애국지사 김남수선생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김남수는 1919년 예안 장터에서 열린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것을 비롯해 서울에서 민중운동,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1930년 일제에 체포돼 3년 가까이 징역살이를 한 후에도 4차례 투옥되고 10여 차례나 구금됐다. 안타깝게도 광복을 코앞에 둔 194547세로 순국했다. 문중의 숱한 인물들 중에서도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선 두 사람을 기리는 모습에서 가문의 저력이 엿보인다.

 

마당 바로 위에는 수몰지구에서 이식한 어린 느티나무가 제법 넓게 가지를 펼치고 있다. ‘이 나무는 나무이면서 역사이고 정신이다.’ 바닥에 새긴 헌사가 대서사시처럼 비장하다. 고택은 느티나무 뒤편 언덕과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내력을 알고 보면 나무기둥이며 돌담과 기왓장 하나하나가 예스럽지 않다. 후조당은 보수 공사로 들어갈 수 없지만, 다른 건물은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한석봉의 현판이 걸린 탁청정에서 그윽하게 마을을 조망해도 좋고, 지애정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볕 좋은 뜰에서 골짜기 깊숙이 파고든 호수 정취를 즐겨도 좋다.

 

김방식 관장은 관람객이 그저 편하게 구경하고 가면 좋겠다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잖아요. 사전에 공부를 좀 하고 오면 한 채 한 채에 깃든 정성과 가치가 느껴질 겁니다.” 군자마을을 삼킨 안동댐 부근은 안동의 대표 관광지다. 댐 바로 아래 낙강물길공원은 아담한 숲길과 연못이 그림 같은 풍경을 빚어 인증사진명소로 소문이 났다. 그 아래 조정지댐 호수를 가로지르는 월영교는 야경이 특히 은은하다. 국보 법흥사지7층전탑과 일제강점기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의 생가 임청각도 인근에 있다.

 

임하댐과 전주류씨 무실마을

임동면 수곡리(무실마을)의 전주류씨 집성촌은 1980년대 임하댐 수몰지구에서 옮긴 마을이다. 조선 중기 류성이 인근 내앞마을 의성김씨 맏사위로 들어와 수곡리에 정착하며 집성촌을 이뤘다. 류성의 맏아들 류복기(1555~1617)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작은아들 류복립은 외삼촌인 학봉 김성일을 따라 진주성을 지키다 순절했다.

 

일대의 전주류씨는 모두 류복기의 후손인데 나주목사 류정휘, 밀양부사 류지, 청백리에 오른 류경시, 공조참의 류승현, 형조참의 류관현, 대사헌 류정원 등 무수한 인물을 배출하고, 이름난 선비가 끊이지 않아 지역의 명문으로 성장했다. 상변통고 22권을 쓴 동암 류장원(1724~1796), 50여 권의 문집을 남긴 정재 류치명(1777~1861)은 퇴계 학맥의 대표 학자로 꼽힌다.

 

일제강점기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류시연, 개화기 협동학교를 창설하고 사회 개혁에 매진한 류인식, 파리장서사건의 주역 류필영, 임시정부 국무위원 류림 등 근대사에 이름을 남긴 이도 수두룩하다. 무실마을은 뒤편 아기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마을을 둘러싸는 형상으로 흐른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수몰지구에서 이전한 마을에 현재 6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그중 36가구가 전주류씨다. 고택은 군자마을처럼 대대적으로 옮기지 못하고 일부 중요한 건물만 이건했다.

 

류복기를 제향하는 기양서당과 무실종택, 류성의 처 의성김씨 정려문, 1939년 류진걸의 호를 따서 지은 수애당이 마을 서편에 자리 잡고 있다. 종택과 수애당 앞에는 망향정을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돼 있다. 넓은 호수를 품은 늦가을 풍경이 고즈넉하다. 불천위(신주를 묻지 않고 영구히 제사 지내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사람의 신위)에 오른 류치명의 정재종택은 강 건너 언덕에 위치한다.

 

무실마을 주민의 상당수는 구미 해평면 일선리로 집단 이주해 마을을 형성했다. 만령초당, 삼가정, 용와종택, 침간정, 동암정 등 많은 누정과 고택이 무실이 아닌 일선마을로 옮겨 갔다. 임하댐 아래 내앞마을은 입향조 류성의 처가인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종택을 비롯해 여러 고택이 고즈넉하게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데, 1885년 김대락이 지은 백하구려는 일제강점기 안동 독립운동사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그의 집안은 삼천석 집으로 불렸다.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으로 학문과 경제력을 모두 갖췄다는 의미다. 명문가의 장남으로 남부러울 것 없던 김대락은 1907년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가 설립되자 나라의 장래를 위해 백하구려 사랑채를 확장해 교실로 사용하게 했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에는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한 후 일가친척 1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건립 자금을 대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힘썼다.

 

내앞마을 의성김씨 전체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거나 다름없었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이 마을에 자리 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마을 앞 하천의 개호송 숲과 백운정은 예부터 아름답기로 이름난 경관이다. 개호송 솔숲은 광해군 때인 1617년 의성김씨 문중에서 하천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해 소나무 1,000여 그루를 심어 조성했다. 백운정은 강 건너 솔숲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호수에 비친 절벽과 정자가 그림처럼 고요하고 평화롭다.

 

 

 

 

 

 

 

 

 

 

 

 

 

 

 

 

 

 

*****   감사합니다   *****